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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은 집으로 들어와 대문을 닫음과 동시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종일 견뎌왔던 극도의 긴장감이 끊어지면서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탓이었다. 그렇게 현관에서 주저앉아버린 세인은 엉금엉금 기어 침대위로 올라가서는 쪼그려 앉았다. 주르륵. 뜨거운 액체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불도 켜지않아 어두컴컴한 자취방 안, 누가 그 눈물을 볼 리가 없건만 세인은 누가 볼세라 얼굴을 무릎사이에 파묻고서 중얼거렸다.
"보고 싶지 않아...보기 싫단말이야..."
"왜...왜 나만 저런게 보이는거야...흑...흑..."
서러웠다. 자신만 검은색을 보고, 그래서 자신만 그런 공포감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이. 차라리 검은색을 보지 못한다면, 어머니의 죽음도, 선생님의 죽음도 그저 우연한 사고였다고 생각하고 살아올 수 있었을 텐데. 검은색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들 그저 불행한 사고로 생각하고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세인이 우는 이유는, 외로이 느껴야 하는 그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위험한 걸 알아....아는데...내가 뭘 할수 있지?"
세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촉촉히 젖어 글썽이는 그 눈은 초점이 없이 흐리멍텅했다.
보육원 선생님의 죽음을 알고도 막지 못했을때 뼈저리게 느꼈던 감정,'무력감'. 세인을 서럽게 하는것은, 공포보다도 바로 그 무력감이었다. 학교가 검은색으로 보인다.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중 누군가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이다.학교가 위험하니 학생들과 선생님들에게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봐야, 믿어줄 사람이 있을 리 없고, 자신만 미친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하지만 그런 일을 제외하면, 자신이 할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답답해져왔다. 위험에 빠진 것이 분명한 사람들을 눈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그 사실이, 세인은 너무나도 서럽고 또 원통했다.
"하아..."
세인은 한숨을 쉬면서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숨이 막히도록 답답한 마음에 바람을 쐬고 싶어져서였다. 하지만 창문을 열면서 무심코 바깥을 바라본 세인은, 다시한번 그 답답한 감정이 자신의 가슴을 옥죄어 오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자신이 머무는 오피스텔 앞 골목길을 따라 걷고 있는 검은색의 여자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저 사람도 죽게 되겠지?'
세인은 멍한 눈동자로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답답한 감정이 납덩이처럼 가슴 한구석을 짓눌러왔지만, 더는 고통스러워 할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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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어.'
세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뒤돌아섰다. 또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 세인이 침대에 엎어지려 한발짝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너는 일주일 내로 죽는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고, 말은 길지 않았지만, 그 메시지는 강렬한 메아리가 되어 세인의 머릿속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깜짝놀란 세인이 황급히 뒤돌아 창밖을 내다보자, 회색의 후드를 깊숙히 눌러쓴 한 남자가 좀전의 검은색의 여자를 붙잡고 말하고 있었다.
"하...?"
여자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그런 여자의 표정따위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자기 할말을 이어갔다.
"살고싶다면 오늘밤 9시, 새미천 6번 다리위로 오도록."
그렇게 자기 할 말을 마친 남자는, 여자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빠른걸음으로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여자는 한참동안 제자리에 서서 사라져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별..미친.."
하고 욕지기를 하면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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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도, 남자도 골목길을 빠져나가고 후미진 그 골목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세인은 아무도 없는 텅빈 골목을 멍한 눈동자로 계속해서 응시했다.
"죽을 거라는걸.. 알고 있었어..."
비록 그 여자는 믿지 않은듯 했지만, 남자는 여자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남자가 검은색을 보는 것일지도 모름을 의미했다. 게다가,
"살고싶으면...찾아오라고...?"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살고싶으면, 밤9시 새미천 6번다리위로 오라고.
'그럼 검은색 사람을 살리는 방법도 아는건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한줄기 빛이 칠흑처럼 어두웠던 세인의 머릿속을 관통했다. 아무것도 할수 없었던 무력감이라는 깊고 검은 절망의 늪에서, 밖으로 이어지는 밧줄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적어도 세인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저 사람을 만나야만 해'
그렇게 생각했다.
그 남자가 설령 검은색 사람을 제대로 살리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좋았다. 아니, 지나가는 사람마다 붙잡고 그런 소리를 해대는 협잡꾼이라 해도 좋았다. 눈앞에 나타난 그 희망이라는 밧줄을 당겨보지도 않고 놓아버리기에 그녀는, 현재의 무력감에 너무나도 지쳐있었다.
간만에 소게에 올라오는 소설인데 덧글좀 달아주시져. 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