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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여자에게 나오라고 한 시간은 9시였지만, 세인은 8시부터 나가 기다렸다. 남자가 자신을 기다려 줄 리는 없기에, 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여자를 만나면 자리를 옮겨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이미 해는 완전히 져 있었고, 다리를 따라 설치된 가로등도 썩 밝지 않고 어두컴컴했다. 세인은 다리 난간에 기대어 그 어둠속으로 흘러들어가는 물길을 바라보면서, 혼자서 골똘히 생각했다.
'그 사람도 검은색이 보이는 걸까?'
줄곧 외롭고, 두려웠었다. 자신만 검은색이 보인다는 사실보다도, 그 사실을 믿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현실이. 그래서 항상 그녀가 느끼는 공포는 온전히 그녀의 것이었고, 그렇게 그녀에게만 남겨진 공포는 원래의 크기보다 두배, 세배는 커다랗게 혼자남은 그녀를 짓눌러왔다. 만약 그 남자도 검은색을 보는 것이라면, 아니 그 남자가 죽을 사람이 검은색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믿어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느끼는 공포감이 반감될 수 있을것 같았다.
"...."
처음 느껴보는 낯선 희망에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그녀는 다리밑의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았다가, 시계를 바라보았다가를 반복했다.
"역시..너무 빨리 나왔나..?"
세인은 혼자서 멋쩍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시계는 이제 막 여덟시 십분을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방안에서 혼자 중얼거릴 때와는 정반대로 밝게 들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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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호는 자신의 방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기다리다가, 약속한 시간이 되어가자 책을 덮었다.
"뭐...어차피 오지 않겠지만..."
언제나처럼 후드를 깊숙히 눌러쓰며,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오며가며 그것이 붙어있는 사람들을 보면 찾아오라고 말을 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장소로 나온사람은, 여지껏 단 한명도 없었다. 아마 오늘 낮에 오라고 말했던 그 여자도 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의 말을 믿지 않은 사람은 보나마나 며칠 못가 자신에게 씌여있는 그것에 의해서 죽었을 것이고, 재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그들을 찾아다니며 살리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자신은 분명히 살고싶으면 찾아오라고 말을했고, 그것도 충분한 호의를 베푼것이다.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은 사람이 죽든지 말든지, 그건 자신이 신경쓸 바가 아니다. 그는 항상 그렇게 생각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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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의 들떴던 마음은,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짐에 따라 초조함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여자는 나오지 않을것이 뻔했고, 남자도 그냥 오며가며 아무에게나 그런소리를 해대는 협잡꾼일 수도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처음으로 보였던 희망이라는 것이 점차 멀어져가는 그 느낌을, 예상하긴 했다는 생각만으로 위로하기는 어려웠다.
약속한 시간인 9시가 되었지만, 남자도,여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늦을수도 있는 거잖아..."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애써 사그러드는 희망을 붙잡고 있었다. 1초, 1초가 흘러갈때마다 그 희망이 자꾸만 작아져갔다. 그렇게 1년같은 1분이지나고, 10년같은 2분이 지났지만, 그곳엔 남자도, 여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조금만...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세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있을때, 멀리 어둑어둑한 가로등 밑으로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아...!"
세인은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낮게 탄성을 질렀다. 너무 멀어서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회색의 후드를 눌러 쓴것만은 알아볼수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낮의 그 남자의 후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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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호는 약속한 다리 밑에 도착해서는 코를 킁킁거렸다. 어둑어둑한 다리 가로등 밑에 서있는 어떤 여자의 모습이 보였지만, 낮에 보았던 그 여자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시계를 보았더니 아홉시에서 2분이 지나고 있었다.
"역시..."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곧바로 발걸음을 돌렸다. 항상 있던 일이고, 그래서 예상했던 일이지만, 그렇게 돌리는 발걸음은 언제나 가볍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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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앞에 도착한 남자는 잠시 다리 위를 보는듯 하더니, 필요한 것을 확인했다는 듯이 곧바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떻게 그 거리에서 다리위에 서있는 사람을 확인한 것인지 신기할 법도 했지만, 세인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세인은 급히 그 남자를 따라갔다. 그는 걷고 있었지만 세인이 뛰는것과 속도 차이가 거의 없을만큼 걸음이 빨라서,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질 않았다.
세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기요...! 잠시만요....!!"
재호는 세인의 목소리를 듣고 멈추어섰고, 그제서야 세인은 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헉...헉..."
"무슨 일이지?"
세인은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고 있었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감정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세인은 그의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무정함에서 왠지모를 위압감을 느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기...낮에 어떤 여자분에게 죽을거라고... 살고싶으면 찾아오라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거든요.."
"...?"
재호는 그제서야 뒤돌아 세인을 바라보았다. 교복을 입고, 쳐진 눈꼬리의 온화한 인상을 가진 평범한 소녀가 자신감없이 눈을 내리깔고 서있었다. 소녀가 중얼거리듯 말을 계속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도 그 사람의 죽음이 보이거든요...?"
세인이 말을 마치며 고개를 들었다. 재호는 자신의 눈이 보일까 후드를 꾸욱 누르며, 세인의 얼굴을 살폈다. 자신감 없는 말투와는 반대로, 그녀의 눈동자는 사뭇 진지했다.
"...따라와 봐."
재호가 뒤돌아서며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는 여전히 감정이 없었지만, 세인의 표정은 환하게 밝아졌다. 재호의 그 짧은 말 한마디가, 어쩌면 도움을 받을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검은색 학교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세인의 가슴을 부풀게하기에는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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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구상당시 그렸던 세인 스케치.
타블렛으로 터치한 기억이 있는데 그림파일이 어디에뒀는지 없네여 ㅡㅡ
다시 그리고 싶긴한데 타블렛이 고장나서 fail.
근데...가슴..가슴이 없네!